[제12편] 한국 근현대 여성, 교육.사회운동가 이태영-법으로 여성을 가르친 선구자
법을 배울 수 없던 시대에 법을 배우고, 법이 외면한 여성들 곁에서 평생을 싸운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이자 교육자.
1956년 어느 날, 한 여성이 대법원장실 문을 두드렸습니다. 세 번, 네 번, 번번이 빈손으로 돌아섰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문이 열렸을 때 대법원장 김병로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습니다.
"또 왔소?"
"네, 대법원장님. 또 왔습니다. 불평등한 가족법을 개정해 주십시오."
이것이 이태영이었습니다. 거절당할수록 더 단단해지고, 비난받을수록 더 선명해진 사람. 그는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로서, 이화여대 교수·학장으로서,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설립자로서 — 법과 교육을 두 기둥으로 삼아 수십만 여성의 삶을 바꿨습니다.
1. 배울 수 없는 시대에 배운 여자
1914년 평안북도 운산에서 태어난 이태영은 어릴 때부터 배움에 대한 열망이 남달랐습니다. 그러나 당시 여성에게 법학은 완전히 닫힌 문이었습니다. 이화여전에는 법학과 자체가 없었고, 공학(共學) 법과대학에는 여성의 입학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포기하는 대신 연희전문학교 정광현 교수에게 따로 법률 과외를 받으며 독학으로 준비했고, 1936년 이화여전 가사과를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졸업 후 평양여자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며 가정을 꾸렸지만, 법에 대한 꿈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해방이 되자 그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세 자녀를 키우는 서른두 살의 어머니가, 남편이 독립운동으로 수감된 상황에서, 1946년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여성 최초로 입학했습니다. 남편 정일형은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아내의 강의실을 드나들며 외조했습니다. 1949년 법학사, 1957년 법학석사, 1969년 — 쉰다섯의 나이에 — 법학박사. 배움을 향한 그의 발걸음은 나이도, 시대도 막지 못했습니다.
2. 사법고시 합격, 그러나 판사는 안 된다
1952년, 이태영은 제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습니다. 대한민국 사법시험 역사상 최초의 여성 합격자였습니다. 김병로 대법원장은 즉시 그를 판사로 임용하자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했습니다.
이승만은 거부했습니다. 야당 인사 정일형의 아내라는 이유였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도 있었습니다.
판사의 길이 막히자 이태영은 방향을 틀었습니다. 변호사 개업.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최초의 여성 변호사"라는 소문이 퍼지자, 법과 인습에 짓눌려 울던 여성들이 전국에서 몰려왔습니다. 소박맞은 아내들, 재산을 빼앗긴 어머니들, 억울함을 하소연할 곳조차 없던 여성들이었습니다. 그중엔 달걀 한 알을 들고 찾아온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태영은 훗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변호사가 된 건 행운이었다. 그 덕분에 많은 여성들을 도울 수 있었다."
3. 교단에 선 법학자 — 이화여대 교수·학장
이태영은 변호사로 활동하는 동시에 1963년부터 1971년까지 이화여자대학교 법정대학 교수 겸 학장을 역임했습니다. 그는 강의실에서 여학생들에게 법학을 가르쳤고, "법 앞에 남녀는 평등하다"는 헌법의 문장이 현실에서도 살아 작동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후학 양성에도 열정적이었습니다. 당시 여성 법조인이 극히 드물었던 시절, 사법시험에 합격한 여성들은 사법연수원 입소 전후로 단체로 이태영을 찾아와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이들에게 스승이자 선배였고, 길을 먼저 걸어간 사람이 후배에게 내미는 손이었습니다.
교육자로서 이태영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었습니다. "법을 아는 여성이 늘어야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 — 이것이 그의 교육 철학이었습니다.
4. 한국가정법률상담소 — 법을 몰라서 우는 이들 곁에
1956년, 이태영은 한국 최초의 법률 구조 기관인 여성법률상담소(현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설립했습니다. 법률 지식이 없어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저항조차 못 하는 여성들을 위한 공간이었습니다.
상담소는 처음부터 무료로 운영됐습니다. 가정 내 폭력, 이혼, 재산 분쟁, 부당 해고 — 세상의 모든 억울함이 이곳으로 흘러들었고, 이태영과 동료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수십 년이 지나는 동안 상담소는 단순한 법률 서비스 기관을 넘어 여성 권리 교육의 현장이 됐습니다.
5. 30년의 싸움 — 가족법 개정과 호주제 폐지
이태영이 평생을 건 싸움이 있었습니다. 가족법 개정이었습니다.
당시 한국 민법은 호주제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호주(戶主)는 반드시 남성이어야 했고, 여성은 결혼하면 남편의 호적에 올려지는 '부속물'이었습니다. 이혼 시 재산분할청구권도, 자녀 친권도 사실상 여성에게는 없었습니다.
1952년부터 각종 청원서와 진정서를 통해 가족법 개정운동을 시작한 이태영은 30년 넘게 법조계의 비난과 정치권의 냉대를 견뎌냈습니다. 1989년, 드디어 가족법이 개정되었습니다. 이혼 시 재산분할청구권 인정, 부모 친권의 평등 적용 — 오백 년 묵은 인습의 벽에 균열이 생겼습니다.
개정 소식을 들은 이태영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성이 새로운 것을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제 자리'를 찾았을 따름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사람 노릇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가 생전에 끝내 이루지 못한 호주제 완전 폐지는 그의 사후인 2005년, 후배 여성운동가들의 헌신으로 완성되었습니다.
6. 민주화의 현장에서도
이태영의 싸움은 여성 문제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1974년 민주회복 국민선언, 1976년 3·1 민주선언에 참여하는 등 민주화운동에도 적극 동참했습니다. 1977년에는 명동 3·1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아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기도 했지만, 1980년 복권 후 다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여성의 권리와 민주주의는 그에게 하나의 싸움이었습니다.
7. 국제사회가 인정한 이름
이태영의 업적은 국경을 넘어 인정받았습니다.
- 막사이사이상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림)
- 유네스코 인권교육상
- 국민훈장 무궁화장 (대한민국 최고 훈장)
- 제1회 법을 통한 세계평화상
- 제3회 세계 법률구조상
- 세계감리교 평화상
- 기네스북 등재 —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
1970년 국제법률구조연합회 이사 및 부회장, 1973년 세계여자변호사회 부회장, 1981년 국제법률가위원회 위원 등 국제 무대에서도 한국 여성의 목소리를 대표했습니다.
법으로 쓴 교육, 삶으로 가르친 평등
이태영은 강의실에서 법학을 가르쳤고, 법정에서 억울함을 대변했으며, 상담소에서 수십만 여성에게 스스로를 지키는 법을 알려주었습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의 행위였습니다 — 교육. 지식을 통해 사람이 스스로 일어서게 만드는 일.
그는 평안북도 운산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법조계와 권력의 문이 닫힌 시대를 살았으며, 그 닫힌 문을 하나씩 두드려 열었습니다. 그가 걷지 않았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길 위에, 지금 수많은 여성들이 서 있습니다.
한궁이 기억하는 이태영
| 항목 | 내용 |
|---|---|
| 생몰년 | 1914년 8월 10일 – 1998년 12월 17일 |
| 출생지 | 평안북도 운산군 |
| 분야 | 교육·사회운동가, 법조인 |
| 주요 활동 |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설립, 가족법 개정운동, 이화여대 교수·학장 |
| 대표 저서 | 『가족법 개정운동 37년사』, 『나의 만남, 나의 인생』 외 20여 권 |
| 수상 | 막사이사이상, 유네스코 인권교육상, 국민훈장 무궁화장 외 다수 |
| 안장지 | 국립서울현충원 |
Q&A — 자주 묻는 질문
Q1. 이태영은 어떻게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됐나요?
1952년 제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대한민국 사법시험 사상 첫 여성 합격자가 됐습니다. 당초 판사로 임용될 예정이었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야당 인사의 아내라는 이유로 임용을 거부했고, 이에 변호사 개업을 하면서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됐습니다.
Q2. 이태영이 교육자로 불리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태영은 1963년부터 1971년까지 이화여자대학교 법정대학 교수 겸 학장을 역임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교육은 강의실에서만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1956년 설립한 한국가정법률상담소는 법을 몰라 억울함을 참던 수십만 여성에게 법적 권리를 일깨운 '열린 교육의 장'이었으며, 그가 남긴 20여 권의 저서 역시 시민을 위한 법률 교육서로 읽혔습니다.
Q3. 호주제란 무엇이고, 이태영은 왜 그것을 없애려 했나요?
호주제는 가족을 남성 호주 중심으로 구성하고 남계 혈통을 통해 대대로 이어가는 제도였습니다. 여성은 태어나면 아버지의, 결혼하면 남편의 호적에 '편입'되는 존재였습니다. 이혼하면 자녀 친권도, 재산권도 거의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이태영은 이것이 헌법이 보장한 남녀평등에 정면으로 위배된다고 보고, 30년 넘게 폐지 운동을 이어갔습니다. 호주제는 그의 사후인 2005년에 최종 폐지됐습니다.
Q4. 이태영의 가족법 개정 운동은 어떤 결실을 맺었나요?
1989년 가족법 개정으로 이혼 시 재산분할청구권 인정, 부모의 자녀 친권 평등 적용 등이 실현됐습니다. 그가 1952년부터 37년간 이어온 싸움의 결실이었습니다. 그는 이를 두고 "여성이 새로운 것을 얻은 것이 아니라, 제 자리를 찾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후 2005년에는 후배 운동가들이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호주제 완전 폐지를 이끌어냈습니다.
Q5. 이태영을 기리는 곳이 있나요?
서울 서대문구 봉원동에 정일형·이태영박사 기념관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가 약 20년간 직접 집필한 한국 여성 운동사 원고 메모, 생활 집기, 가구, 상패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2019년부터 초등학교 5학년 도덕 교과서에 '인권변호사 이태영'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생애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메시지
이태영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보다 훨씬 앞에 서 있었습니다.
"또 왔소?" 라는 차가운 물음 앞에서도 "네, 또 왔습니다" 라고 답할 수 있는 사람. 거절을 이유로 삼지 않고, 비난을 연료로 삼은 사람. 법이라는 언어로 여성을 가르치고, 삶이라는 문장으로 평등을 증명한 사람.
오늘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것들 — 이혼 후 재산을 나눌 권리, 자녀를 함께 키울 권리, 내 이름으로 세상에 존재할 권리 — 그것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수십 년 동안 문을 두드린 덕분입니다.
당신이 지금 서 있는 그 자리가, 이태영이 평생 걸어서 만든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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